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송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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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몸평화 작성일19-02-04 10:12 조회1,039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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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 /송강호
부활사건은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 믿음의 시금석이지만 그것에 모든 것을 거는 이들은 드물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철석같이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거기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회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된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하고도 단호했다.
..........................................
정말 이해가 안 되는 건 ‘주님’이라는 말이었어요.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종’으로 살고 있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러한 현실은 내게 ‘아 교회는 대개 그런 거짓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라는 냉소를 불러일으켰어요.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현실과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거슬러, 세상과 맞서, 세상을 전혀 새로운 가치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30-31)
설교에는 예의를 갖춰 ‘아멘’으로 응답하지만, 정작 실제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송강호는 절망했다. 그는 청년들을 밑바닥으로부터 뒤흔드는 에너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필리핀의 엄청난 재난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이 세계가 학교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35)
평화학교는 그 사회에 ‘당신들에게도 미래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인생은 결국 절망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미래가 없는 사회는 오직 현재 움켜쥘 수 있는 한 줌의 권력과 물질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극단의 선택을 합니다. 한 사람이나 사회가 자신들에게도 미래가 있음을 진지하게 인정하면, 서로 간의 갈등과 분쟁을 버리고 평화를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 지역에서 평화캠프를 열고 평화학교를 세우는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49)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안전할 때 들어와서 설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그래야 평화를 만드는 중재와 조정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래서 우리 ‘개척자들’이 분쟁 지역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이유,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는 이유, 주민들과 피난을 갈지언정 외국으로 피하지 않는 이유죠. 그곳에서 사역자들과 있는 동안에는 '네가 어디에서 왔든지 너는 동티모르 사람이야 적어도 네가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그 임기까지는 동키모르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폭동이나 분쟁이 일어나 대사관 측에서 빨리 나가라고 해도 우리는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사실 우리도 고민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 있는게 옳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개척자들 특유의 정신은 이렇게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과 분쟁, 재난과 기아사태에 응답하고 동참하는 것, 그들은 지체없이 현장으로 달려갔고 그 나라에서 그 땅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내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평화캠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59-60)
......
아이들은 너무 해맑고 평화로운 거예요. 그런데 그림을 그려보라 하면 남자아이들은 군인, 여자아이들 중 많은 아이가 경찰을 그려요. 자기들이 그렇게 되어서 가족을 죽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죽일거라고 말하는 거죠. 그 뿐만 아니라 평화학교의 나무 그늘 아래서 공부를 하다가도 장갑차들이 지나가면 얼른 따라가요. 장갑차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총을 경배하는 것 같은 모습을, 저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를 볼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한 달 내내 피스메이커에 대한 연극과 노래를 가르쳤고 한국 동요나 태권도도 가르쳐 주었죠. 아이들은 그걸 따라하면서 시간을 보냈고요....... 평화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값진 시간들이었어요.
....
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란 개념을 소개하는데, 어떤 범죄 행위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대신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그 상처에 대해 공동의 치유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빌며 그 상처를 치유해나가고 피해자는 치료를 통해 가해자를 용서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생하는 공동체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티모르에도 그 회복적 정의가 절실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고 동티모르 평화캠프에도 위기는 있었다. (61-62)
......
기독교의 지고지순한 본질은 소위 ‘기독교적인’ 언어나 문화, 종교 생활이 아니라 바로 정의와 평화를 통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정의와 평화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절실한 가치다. 그래서 ‘개척자들’은 말뿐인 복음전도보다는 오직 정의와 평화사역에 매진한다. 복음이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날 때, 기독교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
하나님의 평화의 대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이 가장 위험한 시점에, 가장 고통스러운 바로 그 현장에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아무리 가난하고 궁핍해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그들을 통해 배웠어요. 그리고 우리가 남을 돕는 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64~65)
개척자들의 10가지 정신
.....
7. 우리는 유산을 상속받지도 상속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소유물에 대하여 청지기적인 삶을 산다. (65)
쓰나미로 피해를 입자 게릴라들도 가족을 찾아 하산하고 그리고 총을 절단기로 잘라내는 광경은 이제 더 이상 서로 전쟁이나 무력 투쟁을 하지 말자는 상징적인 의미엿죠. 정말 아름다웠어요. 아체에 평화의 봄이 찾아왔어요.
....
하나님의 사랑을 때로 처절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부서뜨릴만큼, 그렇게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절망의 땅에서 하나님은 평화사역을 시작하신다. 아체는 거대한 쓰나미에 전부를 잃은 것처럼 절망했지만, 그로 인해 그들의 땅에는 평화와 화해가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희망한다면, 기껏 절망 따위에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71)
'너 정말 해군기지를 막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 너 정말 각오가 된 사람이야?라고 자문했다. (82)
박노해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는 ‘복잡한 현실을 품고’ 진리를 향해 ‘가장 단순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이 피하실 수 없었던 그 운명의 잔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기다리자 그 때, 그날이 오면 우리의 찬란했던 생애에 대한 찬미와 우리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축배를 들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장렬하게 살자. 우리는이 죽음이 우리 생애의 절정이 되기를 바란다. 어차피 우리는 죽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생애도 덤으로 받은 은혜의 일부이니까 (83쪽)
송강호는 제주도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이 중단될 뿐만 아니라 이미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와 공군기지들까지 모두 육지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제주도만이라도 군사기지나 군인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 멀지 않은 훗날 대한민국 전체를 비무장 평화 중립국가로 이끄는 예인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와 조정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견인해 나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시대적 사명입니다.“(90)
건강한 기독교의 바로미터는 ‘그 교회가 정의를 말하고 있는가? 그 교회가 평화를 위해 실천하고 있는가?’입니다.(92)
돈 리처드슨이 쓴 <화해의 아이>를 보면 파푸아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선교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 파푸아의 선교 현장에도 정의에 대한 가르침이 빠져 있어요.
때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의 가치는 오롯이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정의가 꺾이고 평화가 스러질 때 그는 더욱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맞고 찢기고 멍들고 상처나고 잡혀갈 수 있겠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평화에 대한 희망이 아득해질 때, 오히려 그는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는 지금 다만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다. (93-94)
앞으로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통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좀 과격한 얘기라서 지금 밝히기가 어려운데, 저는 여전히 단순해요.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것은 직접 만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국가보안법이든 북한의 법이든 뛰어넘고 우리는 같은 겨레이기 때문에 직접 만나 경험하는 것보다 빠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도소에 갇혀서도 앞으로 겪을 일을 미리 경험해두자라는 생각을 하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평화를 위해 산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는 법에 의해 많이 처벌받고 투옥될 수 밖에 없는게 자명한 현실이예요. 예전에는 그것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주 순진무구한 생각이었죠. 우리 사회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가치를 허용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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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현장에서 비로소 인간은 변화돼요.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죠.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처절하게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거예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천국을 찾지말고 지옥을 찾으라고 해요 적어도 이세상에서는. (98)
많은 청년이 젊을 때는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을 결심하지만 점차 그런 신앙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라는 어떤 청년의 질문에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데 따르는 고난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 물질적인 손해, 자유의 구속을 포함합니다. 고난으로 단련되지 않는 신앙은 유혹이나 위협이 오면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게 됩니다. (146)
잉게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서 한스숄의 아버지는 한스숄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비록 인생의 길이 험난하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인생을 자유롭고 올바르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157)
10분 접견이 하루 종일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다는 것도 감옥에서 배운 인생경험이다. 꼭 마약처럼 흥분된 상태가 하루를 간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놀랍다. (159)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강정에서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강정에서는 다시금 불의가 정의를 무릎 꿇게 하고 폭력이 평화를 짓밟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강정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폭행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며 심지어 투옥되고 수감될지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둘러싸여 있다. 감미로운 정의와 평화의 노래가 우리를 두르고 있다. 실패를 계속하자. 포기하지 않는 실패는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정의가 마침내 승리할 것을 믿는 그 희망으로 일흔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자. 만일 우리가 2-3년 안에 강정에서 해군기지를 쫒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강정은 지난 10여년간의 평화 경험을 비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강정에 해군기지가 지어진다면, 강정은 앞으로 백 년 혹은 천년이 넘도록 평화활동가들을 길러내는 학교가 될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겠지만 그 길이 하나님의 길인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긴 고난의 길을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길과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161)
진짜신앙은
첫째. 탐욕을 버리는 신앙이다.
둘째 거만하지 않는 신앙이다.
셋째,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신앙이다. (162)
무고한 시민들, 어린이들과 여인들과 노약자들처럼 명백한 전쟁 피해자들을 조사해서 이들의 죽음과 부상을 확인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 국가를 상대로 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 (172)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 자족과 자제다(173)
나는 늘 후배들에게 공동체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고 말했다. 내 자신이 주장했던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있는 것 같다.(179)
공동체의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 방식으로 평화를 만들려고 고집하지 말고 평화가 우리를 이끌어 가도록 끌려갈 준비를 하자. ‘개척자들’이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척자들’의 생존을 위해서 평화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순서를 망각할 때 공동체는 고립되고 화석화되어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180)
혹시라도 아버지가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거나 당신의 삶을 변절하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긍정적 믿음을 지속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의심은 하지 않습니다. (184/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경기에 굳게 닫힌 취업의 문 앞에 초조하고 초라하게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손에 든 입사원서를 과감히 찢어 버리고 전업평화활동가들이 되기를 희망한다. 취업과 구직의 길은 피나는 경쟁의 붉은 바다이지만, 평화의 일은 그 길을 찾는 이가 적은 푸른바다다. 나도 처음 이 길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구걸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할 거라고 짐작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 굶지 않는다.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의 종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196)
세상에 불가능한 꿈은 없다. 단지 그 꿈을 함께 품는 이가 부족할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품을수록 이 꿈의 실현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평화의 꿈은 평화를 향한 항해에 오르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단지 꿈일 뿐이다. 배에 올라타라. 깊고 푸른 평화의 바다를 항해하자! 기억하라. 위험한 곳일수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평화를 위한 삶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한다. 동시에 그 안에 놓여 있는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해로 여러분을 초대한다.(199-200)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200/강우일주교의 설교중에서)
부활사건은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 믿음의 시금석이지만 그것에 모든 것을 거는 이들은 드물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철석같이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거기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 회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된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단순하고도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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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해가 안 되는 건 ‘주님’이라는 말이었어요. 주님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종’으로 살고 있지 않더라는 거예요. 그러한 현실은 내게 ‘아 교회는 대개 그런 거짓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라는 냉소를 불러일으켰어요.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현실과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거슬러, 세상과 맞서, 세상을 전혀 새로운 가치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30-31)
설교에는 예의를 갖춰 ‘아멘’으로 응답하지만, 정작 실제 삶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송강호는 절망했다. 그는 청년들을 밑바닥으로부터 뒤흔드는 에너지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필리핀의 엄청난 재난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이 세계가 학교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35)
평화학교는 그 사회에 ‘당신들에게도 미래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인생은 결국 절망을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미래가 없는 사회는 오직 현재 움켜쥘 수 있는 한 줌의 권력과 물질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극단의 선택을 합니다. 한 사람이나 사회가 자신들에게도 미래가 있음을 진지하게 인정하면, 서로 간의 갈등과 분쟁을 버리고 평화를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쟁 지역에서 평화캠프를 열고 평화학교를 세우는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49)
평화를 만든다는 것은 안전할 때 들어와서 설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그래야 평화를 만드는 중재와 조정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래서 우리 ‘개척자들’이 분쟁 지역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이유, 분쟁이 일어나더라도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는 이유, 주민들과 피난을 갈지언정 외국으로 피하지 않는 이유죠. 그곳에서 사역자들과 있는 동안에는 '네가 어디에서 왔든지 너는 동티모르 사람이야 적어도 네가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그 임기까지는 동키모르사람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폭동이나 분쟁이 일어나 대사관 측에서 빨리 나가라고 해도 우리는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사실 우리도 고민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 있는게 옳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개척자들 특유의 정신은 이렇게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갈등과 분쟁, 재난과 기아사태에 응답하고 동참하는 것, 그들은 지체없이 현장으로 달려갔고 그 나라에서 그 땅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끝내 평화의 씨앗을 심었다. 평화캠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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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너무 해맑고 평화로운 거예요. 그런데 그림을 그려보라 하면 남자아이들은 군인, 여자아이들 중 많은 아이가 경찰을 그려요. 자기들이 그렇게 되어서 가족을 죽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죽일거라고 말하는 거죠. 그 뿐만 아니라 평화학교의 나무 그늘 아래서 공부를 하다가도 장갑차들이 지나가면 얼른 따라가요. 장갑차를 보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총을 경배하는 것 같은 모습을, 저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를 볼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한 달 내내 피스메이커에 대한 연극과 노래를 가르쳤고 한국 동요나 태권도도 가르쳐 주었죠. 아이들은 그걸 따라하면서 시간을 보냈고요....... 평화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값진 시간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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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란 개념을 소개하는데, 어떤 범죄 행위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대신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그 상처에 대해 공동의 치유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빌며 그 상처를 치유해나가고 피해자는 치료를 통해 가해자를 용서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생하는 공동체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티모르에도 그 회복적 정의가 절실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고 동티모르 평화캠프에도 위기는 있었다. (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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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지고지순한 본질은 소위 ‘기독교적인’ 언어나 문화, 종교 생활이 아니라 바로 정의와 평화를 통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정의와 평화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절실한 가치다. 그래서 ‘개척자들’은 말뿐인 복음전도보다는 오직 정의와 평화사역에 매진한다. 복음이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날 때, 기독교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
하나님의 평화의 대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이 가장 위험한 시점에, 가장 고통스러운 바로 그 현장에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아무리 가난하고 궁핍해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그들을 통해 배웠어요. 그리고 우리가 남을 돕는 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64~65)
개척자들의 10가지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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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리는 유산을 상속받지도 상속하지도 않으며 우리의 소유물에 대하여 청지기적인 삶을 산다. (65)
쓰나미로 피해를 입자 게릴라들도 가족을 찾아 하산하고 그리고 총을 절단기로 잘라내는 광경은 이제 더 이상 서로 전쟁이나 무력 투쟁을 하지 말자는 상징적인 의미엿죠. 정말 아름다웠어요. 아체에 평화의 봄이 찾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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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때로 처절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부서뜨릴만큼, 그렇게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실 만큼 사랑하신다. 그렇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절망의 땅에서 하나님은 평화사역을 시작하신다. 아체는 거대한 쓰나미에 전부를 잃은 것처럼 절망했지만, 그로 인해 그들의 땅에는 평화와 화해가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희망한다면, 기껏 절망 따위에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71)
'너 정말 해군기지를 막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 너 정말 각오가 된 사람이야?라고 자문했다. (82)
박노해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그는 ‘복잡한 현실을 품고’ 진리를 향해 ‘가장 단순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이 피하실 수 없었던 그 운명의 잔이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기다리자 그 때, 그날이 오면 우리의 찬란했던 생애에 대한 찬미와 우리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축배를 들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마지막 순간을 장렬하게 살자. 우리는이 죽음이 우리 생애의 절정이 되기를 바란다. 어차피 우리는 죽었고 지금 우리가 사는 생애도 덤으로 받은 은혜의 일부이니까 (83쪽)
송강호는 제주도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제주도에 해군기지 건설이 중단될 뿐만 아니라 이미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와 공군기지들까지 모두 육지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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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만이라도 군사기지나 군인없는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어, 멀지 않은 훗날 대한민국 전체를 비무장 평화 중립국가로 이끄는 예인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중국과 미국,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와 조정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견인해 나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시대적 사명입니다.“(90)
건강한 기독교의 바로미터는 ‘그 교회가 정의를 말하고 있는가? 그 교회가 평화를 위해 실천하고 있는가?’입니다.(92)
돈 리처드슨이 쓴 <화해의 아이>를 보면 파푸아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선교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런 파푸아의 선교 현장에도 정의에 대한 가르침이 빠져 있어요.
때로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나라 때문이다. 정의와 평화의 가치는 오롯이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정의가 꺾이고 평화가 스러질 때 그는 더욱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맞고 찢기고 멍들고 상처나고 잡혀갈 수 있겠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평화에 대한 희망이 아득해질 때, 오히려 그는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그는 지금 다만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다. (93-94)
앞으로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통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좀 과격한 얘기라서 지금 밝히기가 어려운데, 저는 여전히 단순해요.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것은 직접 만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국가보안법이든 북한의 법이든 뛰어넘고 우리는 같은 겨레이기 때문에 직접 만나 경험하는 것보다 빠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도소에 갇혀서도 앞으로 겪을 일을 미리 경험해두자라는 생각을 하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평화를 위해 산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는 법에 의해 많이 처벌받고 투옥될 수 밖에 없는게 자명한 현실이예요. 예전에는 그것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주 순진무구한 생각이었죠. 우리 사회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가치를 허용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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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현장에서 비로소 인간은 변화돼요.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죠.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처절하게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거예요.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천국을 찾지말고 지옥을 찾으라고 해요 적어도 이세상에서는. (98)
많은 청년이 젊을 때는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을 결심하지만 점차 그런 신앙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라는 어떤 청년의 질문에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데 따르는 고난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 고난은 육체적인 고통, 물질적인 손해, 자유의 구속을 포함합니다. 고난으로 단련되지 않는 신앙은 유혹이나 위협이 오면 쉽게 포기하거나 타협하게 됩니다. (146)
잉게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서 한스숄의 아버지는 한스숄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비록 인생의 길이 험난하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인생을 자유롭고 올바르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157)
10분 접견이 하루 종일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다는 것도 감옥에서 배운 인생경험이다. 꼭 마약처럼 흥분된 상태가 하루를 간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도 놀랍다. (159)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강정에서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강정에서는 다시금 불의가 정의를 무릎 꿇게 하고 폭력이 평화를 짓밟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강정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폭행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며 심지어 투옥되고 수감될지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둘러싸여 있다. 감미로운 정의와 평화의 노래가 우리를 두르고 있다. 실패를 계속하자. 포기하지 않는 실패는 무너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정의가 마침내 승리할 것을 믿는 그 희망으로 일흔번씩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자. 만일 우리가 2-3년 안에 강정에서 해군기지를 쫒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강정은 지난 10여년간의 평화 경험을 비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강정에 해군기지가 지어진다면, 강정은 앞으로 백 년 혹은 천년이 넘도록 평화활동가들을 길러내는 학교가 될지도 모른다. 고통스럽겠지만 그 길이 하나님의 길인지도 모른다. 나도 이런 긴 고난의 길을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길과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161)
진짜신앙은
첫째. 탐욕을 버리는 신앙이다.
둘째 거만하지 않는 신앙이다.
셋째,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 신앙이다. (162)
무고한 시민들, 어린이들과 여인들과 노약자들처럼 명백한 전쟁 피해자들을 조사해서 이들의 죽음과 부상을 확인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 국가를 상대로 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 (172)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 자족과 자제다(173)
나는 늘 후배들에게 공동체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고 말했다. 내 자신이 주장했던 것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있는 것 같다.(179)
공동체의 생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 방식으로 평화를 만들려고 고집하지 말고 평화가 우리를 이끌어 가도록 끌려갈 준비를 하자. ‘개척자들’이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척자들’의 생존을 위해서 평화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순서를 망각할 때 공동체는 고립되고 화석화되어 자멸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180)
혹시라도 아버지가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거나 당신의 삶을 변절하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긍정적 믿음을 지속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의심은 하지 않습니다. (184/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불경기에 굳게 닫힌 취업의 문 앞에 초조하고 초라하게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손에 든 입사원서를 과감히 찢어 버리고 전업평화활동가들이 되기를 희망한다. 취업과 구직의 길은 피나는 경쟁의 붉은 바다이지만, 평화의 일은 그 길을 찾는 이가 적은 푸른바다다. 나도 처음 이 길에 발을 들여놓을 때는 구걸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할 거라고 짐작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 굶지 않는다.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의 종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196)
세상에 불가능한 꿈은 없다. 단지 그 꿈을 함께 품는 이가 부족할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꿈을 품을수록 이 꿈의 실현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평화의 꿈은 평화를 향한 항해에 오르는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는 단지 꿈일 뿐이다. 배에 올라타라. 깊고 푸른 평화의 바다를 항해하자! 기억하라. 위험한 곳일수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평화를 위한 삶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한다. 동시에 그 안에 놓여 있는 우리 인생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해로 여러분을 초대한다.(199-200)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200/강우일주교의 설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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